사르트르의 문학관
예술적 창조의 주요한 동기의 하나는, 확실히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느끼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가 드러낸 들이나 혹은 바다의 이 모습, 또 이 얼굴 표정 등 그가 그린 것들을 화포 위에 혹은 글 속에 고정시키고, 관계를 포착하고 거기에 없던 질서를 도입해서, 사물의 다양성에 정신의 통일성을 집어넣는다면 그는 그런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자신을 그의 창조와의 관련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창조된 대상이 그를 빠져나간다. 그는 동시에 드러내 보이고 또 제작할 수는 없다. 창조는 창조적 활동에 대해서 비본질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우선 첫째로 다른 사람의 눈에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창조된 대상은 우리에게는 항상 유예의 상태로 보인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선이나 색이나 또는 어떤 말을 고칠 수가 있다. 창조된 대상은 결코 자기를 억압하지 않는다.
제자인 화공(畵工)이 그 스승에게 물었다. - 「언제 나는 내 그림이 끝났다고 생각해야 겠습니까 」 스승은 대답했다. - 「내가 놀라서 그림을 바라보고, <이런 그림을 내가 그렸다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때다.」라고. 그것은 그렇게 될 때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말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작품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어떤 사람이 창조한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관계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글쓰는 예술(문학)」에서이다. 왜냐하면 문학적 대상이란 이상한 팽이와도 같은 것이어서 오직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는 독서라고 부르는 구체적인 행위가 필요하고, 그것은 다만 종이 위의 검은 자국일 뿐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자신이 쓰는 것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구두 짓는 사람은 치수가 맞기만 하면 자기가 방금 만든 구두를 신을 수가 있고, 건축가는 스스로 지은 집에 살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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