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와 한국 기독교의 성장
1. 서 론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알렌의 입국을 필두로 해서 이듬해 개신교 목사였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의 입국이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의 선교는 그 시작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독교 초기의 선교 사업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부가 선교사들에게 의료사업과 교육사업만을 허락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국가권력과의 충돌을 피해(정교분리정책) 주로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그 기반을 넓혀 갔다. 기독교 전래 초기 의료 선교는 기독교를 기독교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많은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기독교 교육 선교는 세 가지 의미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서구 학문의 수용, 기독교 정신의 전파, 그리고 한국 전 경계하던 정부와 사회전반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완화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알렌의 광혜원에서 보여준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 비천한 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는 의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계층적인 소외감을 없애 주는 한 편 기독교를 수용하는데 있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또 1887년 아펜젤러의 배재 학당 설립에 이어, 이화 학당(감리회), 연희대학, 정신 여학교(북장로회), 평양의 숭실 학교, 숭의 여학교 등 전국적으로 통 문화의 진작이라는 목적이었다. 이런 기독교 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는 민족 운동의 선구가 되어 많은 민족 운동 지도자가 배출되어 독립운동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기독교 단체인 YMCA와 YWCA, 이 두 단체는 이승만, 김규식 같은 독립 투사나 김활란이나 김필례, 유각경 같은 신여성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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