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론
맥아더 논쟁은 지난 7월 강정구 교수가 6.25는 통일전쟁 이라는 주장을 편후, 맥아더 동상 철거 시도를 계기로 본격화됐다. 당시 보수언론들은 강 교수의 주장에 대해 [강 교수는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 의 품에 안기라](조선), [강정구 교수는 왜 대한민국에 있는가](동아), [교수가 적화통일 무산 아쉬워하는 나라](문화) 등 사설을 통해 색깔몰이를 하며 사법처리에 힘을 실어줬다. 잠시 잠잠했던 맥아더 논쟁은, 통일연대와 전국민중연대가 살인마 , 원수 등의 격한 표현을 쓰며 맥아더 동상 철거를 강행하면서 폭발했다. 보수언론들은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쪽의 입장을 비난하며 맥아더 감싸기에 나섰다. 현재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맥아더에 대해 알아보자.
2.맥아더, 그는 누구인가
맥아더는 분명 미군의 최고 엘리트였다. 웨스트포인트를 개교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는 항상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필리핀 점령군 사령관을 지낸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후광도 작용했다. 맥아더는 1차대전에서 최연소 사단장과 준장으로 승진하며 13차례나 되는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다. 43살의 나이로 웨스트포인트 사상 최연소 교장에다가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육군의 최고자리인 참모총장에도 최연소로 취임했다. 총장 재직 때 군 현대화를 추진하며 능력도 과시했다.
그러나 그는 군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평화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침자 라는 등 보수우익적 정견과 대담한 언사로 논쟁을 불렀다. 대공황이 몰아치던 1932년 여름 맥아더는 1차대전에 참전했던 2만명의 퇴역군인들이 약속된 1천달러의 보너스를 미리 지급해달라며 벌이던 농성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는 기관총부대와 탱크까지 동원해, 대검을 휘두르며 이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이들을 쫒아 애나코스티아 강까지 건너 노숙하던 텐트를 불질러 버렸다. 노숙지에 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을 걱정했던 후버 대통령은 강을 건너지 말라고 두번이나 명령했으나 그는 그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맥아더는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 며, 한때 자신의 전우였던 이들을 추악한 몰골의 폭도 라고 태연하게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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