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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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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성격과 정치폭력
1. 저항민족주의의 과잉과 대항 정치폭력의 취약성
개항 이후 한국사를 뒤흔든 힘의 실체가 ‘폭력’이었다면 그것은 타당한 생각일까 그것은 대체로 의도하지 않았던 행위의 결과이거나 19세기 세계사를 결정한 ‘제국주의■자본주의’ 팽창구조와 그 속으로의 ‘강제편입’ 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개인의 힘으로 변화와 방향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인 당대의 세기말은 폭력의 조건 속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정치환경의 절대적 공포효과도 컸다는 점에서 변화의 국면은 전체적이었다.
여기서 ‘절대적 공포효과’ 라는 말은 기존의 정치단위가 갖고 있던 자기정체감과 이를 둘러싸고 있던 문화적 독립변수의 급격한 단절이 불러일으킬 불안과 소외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단일 정치공동체로서 인간관계의 전통틀과 계급관계를 구성하던 왕조국가의 기반이 무너지고 그 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체제가 ‘이식■건조’ 될 것이라는 예측에 담겨 있던 불안의식은 과도기 정치질서를 통과 해야 했던 국가군의 공동운명이자 전후 비교정치학의 주요 연구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데올로기 논쟁이 주류룰 이루었고 사변논쟁에서 비롯되는 이론적 추상성을 배제하지 못하며, 분명한 연구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나뉘어지는 결정적 계기나 그 전후사에 투영된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의 면면들보다 한층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주제는 현재로서의 역사성을 강하게 반영하는 ‘폭력’의 이미지, 바로 그자체다.
개항 후 한국의 근■현대사를 ‘구성■결정’ 한 핵심의 동인이 폭력이었다는 경험적 사실은 아직 충분히 이론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았던 행위의 결과물들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유인■구속’ 하는 수많은 변수들에 의해 강력한 효과를 입증했던 폭력 개념은 적잖은 연구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줄곧 반폭력적 사고와 관념적 평화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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