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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무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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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무신정변
무신들의 반란으로 고려 귀족사회는 결국 1170년에 붕괴되었다. 귀족사회의 내부적 모순으로 폭발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귀족정치의 몰락의 단적인 표현이었는데, 이제 무신란의 발생과 무신정권의 성립은 귀족사회의 결정적 파국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무신란 발생의 요인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에 있었다. 고려의 귀족정치가 성숙함에 따라 문벌귀족들은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를 확대하여 특권적 지위를 향유하였는데, 이를 놓고 귀족들 사이에 치열한 자기항쟁이 전개되었으며, 특히 기성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 신진관료들의 도전이 치열하였다. 이러한 지배세력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귀족사회는 동요되었으니, 이것이 무신란 발생의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신란 발생의 직접적인 동기는 귀족정권의 대무신정책의 모순에 있었다. 고려는 양반제도를 만들어 문반과 무반을 하나의 관제안에 일원적으로 편성하고 법제적으로는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 숭문천시(문을 중히 여기고 무를 천히 여기는것)의 정책에 따라 문반에 비해서 무반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귀족은 문반직을 가지고 정치권력을 차지하였고 심지어는 군대를 지휘·통솔하는 병마권까지도 장악하여 무반은 다만 문신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대우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은 서서히 그의 지위를 상승시켜 나갔다. 양반이라 하는 법제적 지위를 근거로 하고 거란·여진과의 전쟁을 통해 현실적인 세력을 축적하여 나갔던 것이다. 1076년에 갱정된 전시과에서 무반에 대한 대우가 좋아진 것이나, 1109(예종 4년)에 무학재가 설치된 것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귀족정권의 천무정책에도 불구하고 무반의 현실적인 지위의 상승이 무신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문신귀족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도 무신봉기의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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