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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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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쟁사
동명성왕 2년(서기전 36)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삼국사기]
동명성왕 4년(서기전 34)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삼국사기]
동명성왕 6년(서기전 32)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으로 삼았다.[삼국사기]
동명성왕 10년(서기전 28)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삼국사기]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삼국사기]
유리명왕 22년(서기 3)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삼국사기]
유리명왕 32년(서기 13)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들이 곧바로 학반령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삼국사기]
유리명왕 33년(서기 14) 가을 8월에 왕은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 한나라의 고구려현[현은 현도군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삼국사기]
대무신왕 4년(서기 21)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삼국사기]
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유리명왕)이 서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대무신왕)가 섰는데, 이에 부여를 병합하였다.[북사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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