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항쟁과 남조선노동당
1. 제주4․3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제주 4·3항쟁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과 주위의 각 오름들에서 일제히 봉화가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1,500여명(무장 500명, 비무장 1000명)의 인민자위대는 도내 24개 지서 가운데서 제1구 경찰서 관내 화북 ,삼양, 조천, 세화, 외도, 신엄, 애월, 한림지서와 제2구 경찰서 관내 남원, 성산포, 대정지서 등 11개 지서와 서북청년단숙사, 국민회, 독촉, 대동청년단 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제주 4·3항쟁은 57년 4월 2일 마지막 빨치산인 오원권이 생포될 때까지 만 9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전투와 항쟁 그리고 살육은 1948년과 49년에 집중되었다.
4·3항쟁은 크게 보아 세 시기로 진행되었다. 첫째 시기는 선거가 실시되기 전까지의 시기로 5·10단선을 파탄시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둘째 시기는 선거가 치루어지고 난후 -비록 제주도에서는 선거를 파탄.저지시켰지만-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 사실화된 시기이다. 4·3발발 이후 5·10단선 전까지는 ‘무장투쟁’이라고는 하지만 좀 더 조직적이었다는 점을 빼놓고는 공격횟수나 규모면에서나 당시 전국적인 단선거부투쟁의 면모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5·10단선이 끝나고 미군정과 군경토벌대에 의한 강경진압작전이 실시됨에 따라 인민유격대는 자위적이고 방어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수립이 확실시됨에 따라 남로당을 비롯한 항쟁 세력은 인민공화국수립으로 투쟁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는 북에서 세워지는 인민공화국에 대한 정통성을 확보하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능동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그들과의 타협여지가 봉쇄되어 정면으로 무장투쟁을 하고 있었던 상황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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