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岩 차이석(車利錫) 선생
1881. 7. 27~1945. 9. 9
․1921년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편집국장
․1922년 시사책진회, 흥사단 원동위원부 참여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 역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차이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자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 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48년 사회장 당시 이시영․김구 선생의 추모담 중에서 -
민족교육을 통해 쓰러져가는 국가를 지탱할 동량을 양성하다
동암(東岩) 차이석(車利錫) 선생은 1881년 7월 27일 평북 선천군(宣川郡)에서 차시헌(車始軒)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입환(徐立煥)이라 이름하기도 하였따.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신학문에 뜻을 두고 1900년에 숭실중학에 입학하여 1904년 5월 정규과정 첫 졸업생(차이석(車利錫), 노경오(盧敬五), 최광옥(崔光玉))이었으며, 졸업 후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교육을 통해 쓰러져 가는 국가를 지탱할 동량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한편, 안창호․양기탁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평양지회 평이원으로 활동하며 신민회의 공화주의 사상과 교육구국, 독립군 기지개척 등 독립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방략을 익혀갔다. 당시, 신민회는 교육기관의 설립, 만주에 독립군 기지개척 등 국권회복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1911년 경에는 이상룡(李相龍), 이시영(李始榮)등 일부 인사들이 서간도로 건너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여 대일항전의 기반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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