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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에 대한 비판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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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문제제기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의 중심인물들은 봉건적 후진성을 일소하고 나라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근대화를 이룩하려는 목적 아래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틈타 집권수구파 세력인 민씨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이 개화파 정권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의 무장공격을 받아 3일 천하로 붕괴되괴 말았다.
개항이후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개화의 사상과 운동은 1960년대 이래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일본의 학계에서 꾸준히 연구가 진척되어 괄목할만 한 업적을 축적하였다. 그것은 약간의 시각차는 있다하더라도, 「자주적인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혹은 혁명)운동 및 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개항이후 조선정부는 방법과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는 자주독립을 위한 개화정책을 취하였다. 시류적인 민씨정권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이 대세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 지배층에 의한 위로부터의 부국강병론이 갑신정변에 의해 단절되지 않았는가의 문제점이다..
둘째, 개화론자들의 愚民觀에 대한 것이다. 나아가 그들중에는 갑오농민전쟁에서 여실히 알 수 있들이 반민중적 입장에서 외세에 의존하여 농민군을 진압하는 자도 있엇다. 그러면 그들의 근대에의 대응방안인 개화론은 이러한 과제와 상치되는 것은 아니가하는 문제점이다.
셋째, 개화파는 자주독립을 수호하기 위하여 문명개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당시에 가치중립적인 친일의 논리 즉, 模日,依日의 주장이 갑오개혁이후에는 附日를 거쳐 매국 매족의 논리로 전개되어가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지금까지의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의 관점, 개화파에 대한 대략적 설명, 갑신정변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므로서 갑신정변의 성격을 이러한 문제점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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