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창군과정에서 발전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미군사 고문관들은 경비대를 비이념적인 직업군대로 육성코자 했다. 따라서 미군정하에서는 군부가 반정치적, 친직업주의적 성향을 띠었다. 이는 당시 경비대의 리더쉽을 30세 미만의 장교들이 장악하여 정치적 성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훈련과 공비토벌에 주력함으로써 정치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 1공화국 출범 이후 이승만(李承晩)은 출신별・지역별로 형성된 한국군 내의 파벌들로 하여금 상호 반목케 하고 갈등을 조장하여 파벌간 분열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이승만의 군에 대한 분리지배 방식은 군부를 정치화시키고 정치군인을 산출시키는 배경적 요인이 되었다. 사회전반의 제도화 수준이 낮은 당시 상황에서 군부 내의 파벌은 이익 추구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군인들은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파벌을 형성하였으며 정치인들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해 군내의 파벌을 교묘하게 이용하곤 했다. 또한 이승만은 군을 통한 정치자금 확보도 시도하여 그가 신임하는 정치군인들에게 정치자금의 헌납을 요구하고 육군 특무부대와 헌병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군통제기능뿐만 아니라 정권의 안정을 위한 민간사회부문의 통제기능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군을 자극한 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려 한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