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 사태를 거치고 ‘서울의 봄’을 지나면서 도전연합의 도전형태는 상당한 발전을 보이며, 이는 광주민중항쟁 시기에 와서는 Tilly의 4단계의 모습을 보일 정도로 정치참여에 관한 가장 최종적 모습을 보이나 당시 신군부의 억압하에서 지역적 한계를 지님으로써 그 한계점을 내포하게 되며 이러한 현상은 광주민중항쟁의 높은 민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게되는 결과를 도출시킨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자위권의 차원에서 일어났다가 참담한 패배로 끝난 ‘광주민중항쟁은 이제 정부 차원에서까지도 “남파된 북괴간첩”과 불순분자들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소요”로부터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으로 복권되었다. 특히 광주민중항쟁은 김영삼 대통령의 『5․13 특별성명』이 인정하고 있듯이 6월 항쟁과 함께 80년대 후반 이후 진행되어온 ’민주화‘와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능케 했을 뿐 아니라 ’외세‘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에서 하나의 단절을 강제했으며 한국전쟁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던 ’진보적 민중운동‘의 복원을 가져 왔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2. 배경과 원인
광주민중항쟁은 단순히 80년 5월 광주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도출사건’이 아니다. 이는 정세 적으로는 10․26에 의해 그 동안 한국사회를 억눌러 온 유신체제, 나아가 관료적 권위주의라고 불리는 억압적 국가형태의 유지 및 해체를 놓고 벌어진 10․26 이후의 일련의 유동적 상황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을 다루기 이전에 다루어야 할 것은 왜 유독 광주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