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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의 청장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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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대 용
1)1) 연암 박지원이 홍대용을 위해쓴 ⌜묘지명⌟, ‘德保’는 홍대용의 자
“德保는 통달하고 겸손하고 식견이 원대하고 이해가 정밀하고 자세하며, 더욱이 음악과 수학, 천문에 뛰어나 혼천의(渾天儀) 같은 여러 기구를 만들었으며, 사려가 깊고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쏟아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가 있었다. 서양 사람들이 처음 지구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德保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 학설이 묘하고 그윽하고 깊었다. 다만 책을 쓰기에까지 이르지 못했으나 그 만년에는 더욱 지구가 돈다는 것에 자신을 가졌으며 이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위의 글은 연암 박지원이 홍대용을 위하여 쓴 묘지명이다. 위의 내용만 보아도 홍대용의 업적과, 인간상을 엿볼 수 있다.
권력 지향적인 조선의 유학자 사회에서 저렇게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탐구한 ‘홍대용’은 과연 누구 일까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83) 그는 조선 영정조 시대의 실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나아갔지만 과거 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고, 2)2) 여기서 홍대용은 고학을 “ 옛날의 교육은 그 어릴 때부터 이미 六藝를 가르쳤으므로 장성해서는 비록 도를 아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아래로 적용함에는 어긋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이는 단지 옛 방식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의 적용을 의미. 또한 실행, 실용이라는 것도 단순히 현실에 필요한 것을 넘어 고학으로 표현되는 유학적 이상이라는 지향을 말하고 있다.
古學과,實學을 지향하였다. 홍대용이 古學과 實學을 왜 지향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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